서평들

독후감(이토록 평범한 미래)

donggle math 2023. 2. 19.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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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 김연수 - 교보문고

이토록 평범한 미래 | 김연수 9년 만의 신작 소설집 종말 이후의 사랑에 대한 여덟 편의 이야기작가 김연수가 짧지 않은 침묵을 깨고 신작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출간한다. 『사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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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배의 밀도로 시간을 체험하는 법: 대학교에서 밴드를 했었다. 항상 방학 때마다 후배들이 모든 선배들에게 연락해서 다 같이 모이고, 공연을 감상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예전에는 직접 무대에 섰었다. 꽤 최근까지만 해도 내가 학부 시절에 본 어렸던 후배들이 큰 선배가 되어 공연했었는데, 이번에는 내가 직접 알고 있는 후배들은 무대에서 내려오고 직접 알고 있는 후배가 큰 선배가 되었을 때 입학한 20대 초반의 후배들이 공연을 선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에서 본 말이 기억난다. '바로 그거야. 정신의 삶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고독의 삶을 뜻하지. 개별성에서 멀어진 뒤에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은 얼마간 서로 겹쳐져 있다는 거야. 시간적으로도 겹쳐지고 공간적으로도 겹쳐지지. 그렇기 때문에 육체의 삶이 끝나고 난 뒤에도 정신의 삶은 조금 더 지속된다네. 우리가 육체로 80년을 산다면 정신으로는 과거로 80년 미래로 80년을 더 살 수 있다네 그러므로 우리 정신의 삶은 240년에 걸쳐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지 240년을 경험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미래를 낙관할 수밖에 없을 거야.(p.231)' 시간적 스케일이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내가 무대에 섰을 때는 나보다 까마득한 선배가 동아리 활동을 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때의 낭만을 떠올리며 같이 그 순간을 상상한다. 반대로 지금의 후배들은 내가 활동했던 이야기를 듣는다. 이를 통해 내가 그때 그 공간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내가 졸업하고서도 조금은 남아있다. 세상의 경이로움을 체험하고, 흔적을 남기며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이 3배의 밀도로 시간을 체험하는 활동은 할 만한 가치가 있다.

 

다른 방법으로 3배의 밀도로 시간을 체험하는 법: 현재는 과거에서 비롯되었으며, 미래로 뻗어나간다.(물리학에서는 아니라고 하지만 넘어가도록 한다.) '과연 그럴까요, 앞으로 두 사람이 결혼하기 때문에 지금 여기 함께 있다고 말하면 싱거운 얘기라며 웃고 말겠지만, 어린 시절에 엄마가 불행하게 죽은 일이 원인이 되어 두 사람이 이번 여름방학에 동반자살을 결심하게 됐다는 말에도 그럴 수 있을까요? 둘 다 생각일 뿐이지만 차이는 분명합니다.(p.31)' A라는 현재를 세 방향에서 해석할 수 있다. 과거의 일이 흘러와서 A라는 상태에 있다는 해석이 하나고, 미래에 있을 일의 원인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는 A라는 상태에 있다는 해석이 다른 하나다. 나머지는 지금 내가 온전하게 느끼는 현재 그 자체다. 쉽게 게임으로 비유하자. RPG 게임을 하면서 일정 레벨에 도달했다는 만족감을 세 방향에서 느낄 수 있다. 그동안 시나리오를 체험하면서 즐거움을 느꼈던 만족감이 하나, 앞으로 더 발전시키면 새로운 콘텐츠를 더 즐길 수 있다는 기대감이 다른 하나. 나머지는 일정 레벨에 도달해서 새로운 능력을 얻었다는 그 자체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각을 생각에 따라서 충분히 깊게 체험할 수 있다. 꼭 그렇게 시간을 보내자.

 

그래서 뭐라도 씁니다: '이십대 초반이 될 때까지 그 존재조차 전혀 알지 못했던 두 사람이 서로 만나고도 사랑하게 될 줄을 알지 못하다가, 십 년쯤 뒤에 다시 만나 사랑을 하고, 또 그렇게 몇십 년을 함께 살다가 헤어진 과정에 대해. 그리고 그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갔는지에 대해, 눈 깜빡할 사이에, 마치 폭풍처럼 지나간 인생에 대해.(p.126)' 그 시각을 충분히 체험한다고 해도 시간이 흐르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나야 흐르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야 있다면 당연히 그쪽을 택하겠지만, 거슬러 올라갈 수 없으므로 시각을 최대한의 밀도로 느끼는 게 아무래도 낫겠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깊은 마음속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사직서를 던져버려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보통의 경제활동은 과거에 노력했던 나를 떠올리게 하고, 내가 생산적인 일에 기여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있으며, 벌어들인 돈으로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외부에 휩쓸리는 대신에 내면을 돌아볼 수 있는 조금의 시간이 있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쓰며 생각하는 행위는 꽤 권장할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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